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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福 山
산 행 일 시 : 2012년 6월 24일(일요일)
산 행 코 스 : 운문령 - 학대산 - 돌탑봉 - 문복산 - 돌탑봉 - 계살피계곡
- 삼계2교
산 행 시 간 : 약 3시간 56분(사진촬영,점심,휴식시간 포함.)
버스가 알바를 하는 바람에 예상치 않았던 운문령에서 산행을 출발합니다.
미역줄나무
이곳은 독도 주의점이다. 이봉우리 밑에 좌측으로 진행하는 길이 아주 반지르르하게
나 있는데 무심코 따라갔다가는 문복산이 아니라 바로 삼계리로 하산을 하니 조심을
해야 될 곳이다. 정등로는 이봉우리에 올라와 우측으로 열려 있다.
운해가 아닌 운무라서 조망이 별로다.
터리풀
여기서 우측으로 지행을 하면 계살피계곡으로 내려간다.
원래 진행등로상 좌측에 있는 하산길인데 사진은 지나와서 찍었다.
지나온 능선
무슨 바위인지?
돌탑봉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문복산을 다녀와 다시 이곳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하산을 한다.
점 심
(12:05 ~ 12:39,약 34분 소요)
재첩회무침으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시 돌탑봉으로 돌아와 삼계리 쪽으로 진행을 하면 이내 나타나는 조망처인데 아무런 조망이 없다.
하산길은 이소나무부터 좌측으로 꺽이면서 경사각이 심하게 내려간다.
경사각이 제법있다.
계살피계곡에 도착
이곳 계살피 계곡에도 수량이 거의 없다.
실개천수준
건천
계곡 옆의 등로길
건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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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슬갑사터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숙종 44년(1718)에 彩軒스님이 쓴 글>에 의하면, 진흥왕 21년(560)에 한 도승이 지금 운문사 5리쯤 못미치는 곳에 있는 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北臺庵터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듣고 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道友 10여명과 산에서 혈맥을 찾아 ‘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 때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 9000步 지점에 嘉瑟岬寺, 남쪽 7리에 天門岬寺, 서쪽 10리에 大悲岬寺, 북쪽 8리에 所寶岬寺 등이었다.
‘鵲岬’은 ‘까치곳’ 곧 가지산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 註에 “가슬갑은 혹은 加西, 또는 加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이다. ‘岬’은 俗言으로 ‘古戶(곳)’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호사(곳절)’라고 하니 ‘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000步쯤 되는 곳에 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하며 고개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오갑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의 발흥기였다.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제24대 眞興王(540~576)은 즉위와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짠다. 우선 각 지방별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장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힘을 왕실에 묶어두기 위하여 불교를 眞興한다. 왕 5년(544)에는 최초의 국립사찰인 흥륜사를 지어 미륵불을 봉안하였다. 왕 27년(566)에는 14년 전에 착공한 황룡사를 완성하였다. 불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였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신라가 원래 부처의 나라라는 불국토사상과, 신라왕이 바로 부처라는 王卽佛 사상이 형성된다. 그리고 화랑이란 청소년 단체를 만들어 이들 집단을 통해 전체 국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왕 때까지를 불교식 왕명시대라 한다. 여기에는 王卽佛 사상이 배경에 깔려있다. 왕실을 석가모니 집안의 환생으로 보는 眞種說을 빌어 와 미화시켰다. 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의 정법을 퍼뜨린 위대한 정복군주인 전륜성왕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전국에 國統, 주통, 군통 등의 승관을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그 뒤 문무왕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오갑사의 창건은 이러한 구상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작갑사는 지금 운문사로, 서쪽의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있다. 다른 갑사들은 폐사되었다.
첫 번째 중창자는 圓光法師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에 隋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왔다. 여기서 화랑 貴山과 箒項에게 ‘世俗五戒’를 내려 주었다.
오갑사가 있는 청도군 운문면 일대는 운문산 기슭이므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다. 그러므로 백제와 고구려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지점이며 왜구의 침공 위험도 없는 곳이다. 따라서 군사교육장 같은 국가시설을 짓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곳은 삼국통일의 뜻을 품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었다. 원광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의 중견지도자인 화랑의 스승이 되어 화랑도의 이론을 세우고 화랑들을 수련했다. 원광은 호국불교를 제창한 승려이다. 그는 왕실에 밀착한 어용승려로, 뒷날 수나라에 보내는 乞士表를 쓰기도 했다. 또 당시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언양과 양산이 이곳에 인접해 있다. 가슬갑사에서 경주로 통하는 산길은 삼계리에서 월성군 산내면을 거쳐 가는 길과, 동쪽 문복산 기슭을 넘어 언양과 산내면을 거쳐 내남면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 주변에는 단련장, 채광지, 숙영지, 소규모 돌성, 도요지 등이 흩어져 있다. 이로보아 이곳은 교육장이자 수도권방위상의 중요한 곳이었던 듯하다.
통일신라 이후 250년간 오갑사의 사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통일 후 군사시설로서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뒤 후삼국의 싸움으로 일대의 다섯 갑사가 모두 파괴되고 남은 기둥만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일연스님(1206~1289)은 1277년부터 1282년까지 운문사에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는데, 당시 가슬갑사 절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嘉瑟岬寺遺蹟地’라 쓴 1m쯤 되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청도의 어떤 인사가 세웠다고 한다. 절터는 1천여 평쯤 되는데, 흙에 묻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 쌓은 듯한 축대가 약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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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 날머리
폐가인데 운치가 너무 좋다.
알탕장소에서 바라본 쌍두봉
창원 소답동 고속도로 앞 마을에 있는 280년된 은행나무.
참 즐산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같이 하신분들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럼, 다음산행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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